訓民正音 1443
한글의 설계
580여 년 전, 소리를 그리는 방법을 설계한 사람들이 있었다. 스물여덟 낱자로 모든 말을 적는 시스템 — 그 설계도를 다섯 장으로 펼쳐 읽는다.
序 첫째 장
말은 있는데,
글자가 없었다
우리말을 소리 내어 쓰던 사람들에게, 그 소리를 적을 글자는 남의 것뿐이었다. 한자는 우리말과 구조가 달라, 백성 대부분은 제 뜻을 글로 펴지 못했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 세종 어제 서문,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현대어로 풀어 씀
1443년 겨울(세종 25년), 세종은 새 문자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3년 뒤인 1446년에는 이 문자의 설계 원리와 사용법을 해설한 책, 『훈민정음 해례본』이 함께 간행되었다. 글자를 만든 사람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를 직접 문서로 남긴 경우는 세계 문자사에서 이것이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그 책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고, 간송 전형필이 사들여 지켜냈다. 지금은 국보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문서는 해례본의 차례를 빌려, 그 설계를 다섯 장으로 읽는다. 자음은 어떻게 그려졌는지(제자해), 모음은 무엇을 본떴는지, 낱자는 어떻게 조립되는지(합자해), 그 조합은 몇 가지인지, 그리고 오늘 이 설계가 어디까지 왔는지(용자례).
制字解 둘째 장 · 자음
글자는
소리를 그린 그림이다
훈민정음의 자음 열일곱 자는 다섯 개의 그림에서 나왔다. 소리를 낼 때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다섯 글자 — 거기에 소리가 세지는 만큼 획을 더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이고,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이다. ㅁ은 입, ㅅ은 이, ㅇ은 목구멍의 모양이다. 발음 기관을 관찰하고, 그 단면을 기하학적 선으로 요약했다 — 15세기의 조음음성학이다.
파생된 글자를 누르면, 새로 더해진 획이 인주색으로 그려집니다.
같은 자리에서 나는 소리는 같은 뿌리 글자를 나눠 가진다. ㄴ을 알면 ㄷ과 ㅌ이 한 가족임이 눈에 보인다. 소리의 체계가 곧 글자의 체계 — 낱자를 하나씩 외우는 문자가 아니라, 규칙을 이해하면 전체가 따라오는 문자다.
制字解 셋째 장 · 모음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고,
사람은 서 있다
모음의 재료는 딱 셋이다. 하늘을 본뜬 둥근 점 ㆍ, 땅을 본뜬 평평한 획 ㅡ, 서 있는 사람을 본뜬 곧은 획 ㅣ. 우주를 세 글자로 요약하고, 그 셋의 조합으로 모든 모음을 만든다.
하늘점(ㆍ)이 땅(ㅡ)과 사람(ㅣ)의 바깥쪽·안쪽에 붙는 자리가 곧 모음의 밝기입니다 — 밖이면 양성, 안이면 음성.
점이 한 번 붙으면 ㅗ·ㅏ·ㅜ·ㅓ(초출), 한 번 더 붙으면 ㅛ·ㅑ·ㅠ·ㅕ(재출). 오늘날의 짧은 획은 원래 모두 하늘의 점이었다. 세 개의 기호와 두 개의 규칙 — 그것이 모음 체계의 전부다.
消失 간주
스물여덟에서 스물넷으로
말은 흐르고, 소리는 변한다. 쓰이지 않게 된 소리와 함께 네 글자가 조용히 은퇴했다.
제주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ㅅ과 ㅇ 사이 어딘가.
ㅎ보다 여리다.
그 일을 대신한다.
合字解 넷째 장
낱자는 흩어 쓰지 않고,
모아쓴다
알파벳처럼 낱자를 한 줄로 늘어놓는 대신, 한글은 낱자를 음절 단위의 네모 블록으로 조립한다. h-a-n 세 글자가 아니라 “한” 한 글자. 소리의 단위가 그대로 눈의 단위가 된다.
조립에는 규칙이 있다. 세로로 긴 모음(ㅏ, ㅓ, ㅣ…)은 첫소리의 오른쪽에, 가로로 긴 모음(ㅗ, ㅜ, ㅡ…)은 아래에 놓인다. 받침이 있으면 그 전체의 아래에 붙는다. 어떤 조합이든 같은 크기의 블록 안에 정돈된다.
이 조립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 계산이다. 유니코드에서 한글 음절 한 글자의 코드값은 AC00 + (초성 × 21 + 중성) × 28 + 종성 — 덧셈과 곱셈만으로 정해진다. 위 조립기가 하는 일의 전부가 이 한 줄이다.
組合 다섯째 장
가능한 모든 글자
초성 19 × 중성 21 × 종성 28 =
11,172자아래 벽에는 “가”부터 “힣”까지, 조합 가능한 현대 한글 음절 전부가 찍혀 있다. 같은 글자는 하나도 없다.
이 여유는 당연하지 않았다. 초기 전산 표준(KS X 1001 완성형, 1987)은 자주 쓰는 2,350자만 코드에 담았다. ‘똠’, ‘뷁’ 같은 글자는 컴퓨터로 적을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조합 규칙 그대로 전 조합에 자리를 마련한 유니코드(U+AC00–U+D7A3)에 와서야, 벽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用字例 여섯째 장
1443년의 세 글자,
휴대폰 자판이 되다
하늘·땅·사람 — 모음을 만들던 세 개의 재료는 560년 뒤 휴대폰의 천지인 자판으로 돌아왔다. 글쇠 세 개면 스물한 개 모음이 전부 만들어진다. 창제 원리가 그대로 입력 방식이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부톤섬의 찌아찌아족은 문자가 없던 자기 말을 적기 위해 한글을 표기 문자로 받아들이는 실험을 시작했다. 지금도 일부 학교에서 한글로 찌아찌아어를 가르친다.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공헌한 이들에게 주는 상의 이름은 ‘세종대왕 문해상’이다. 배우기 쉬운 문자를 만든 임금의 이름이, 세계의 읽고 쓰는 힘을 기리는 이름이 되었다.
1926년 ‘가갸날’로 시작된 기념일. 문자의 생일을 국경일로 쇠는 나라는 드물다. 만든 사람과 만든 날짜와 만든 원리가 모두 기록으로 남은 문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